손석희 파업참여 사진


 어떤 분야 생각하면서 누군가서 생각난다면 그인생은 어느정도 정점에
도달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더구나 그분야의 전문성으로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면 그보다 기쁜일이 어디 있을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영웅만들기에 혈안이 되어있지만 진심으로 애정을
가지고 아끼는 노력은 부족한것 같다. 또한 그런 노력이 인터넷의 영향
인지 너무 가볍고 쉽게 부상하고 또 너무 허망하게 가라앉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본다.

수많은 벤처사업가가 그렇고 인터넷 검색순위의 사람들이 그렇다.
그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단 10년이라도 시간의 파도를 넘어
시대를 대표하는 사람이 될까 생각해본다.

그런의미에서 손석희 아나운서는 분명 한세대를 지나며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될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확신에는 그의 진지함과 치열함으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는 사람이 드물다는 점에서 그렇다.





[방송인 손석희의 지각인생 ]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내가 지각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도 남보다 늦었고 사회진출도, 결혼도 남들보다 짧게는 1년, 길게는 3∼4년 정도 늦은 편이었다. 능력이 부족했거나 다른 여건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이렇게 늦다 보니 내게는 조바심보다 차라리 여유가 생긴 편인데, 그래서인지 시기에 맞지 않거나 형편에 맞지 않는 일을 가끔 벌이기도 한다. 내가 벌인 일 중 가장 뒤늦고도 내 사정에 어울리지 않았던 일은 나이 마흔을 훨씬 넘겨 남의 나라에서 학교를 다니겠다고 결정한 일일 것이다.


1997년 봄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가면서 나는 정식으로 학교를 다니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남들처럼 어느 재단으로부터 연수비를 받고 가는 것도 아니었고, 직장생활 십수년 하면서 마련해 두었던 알량한 집 한채 전세 주고 그 돈으로 떠나는 막무가내식 자비 연수였다. 그 와중에 공부는 무슨 공부. 학교에 적은 걸어놓되 그저 몸 성히 잘 빈둥거리다 오는 것이 내 목표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졸지에 현지에서 토플 공부를 하고 나이 마흔 셋에 학교로 다시 돌아가게 된 것은 뒤늦게 한 국제 민간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얻어낸 탓이 컸지만, 기왕에 늦은 인생, 지금에라도 한번 저질러 보자는 심보도 작용한 셈이었다.


미네소타 대학의 퀴퀴하고 어두컴컴한 연구실 구석에 처박혀 낮에는 식은 도시락 까먹고, 저녁에는 근처에서 사온 햄버거를 꾸역거리며 먹을 때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내 연배들을 생각하면서 다 늦게 무엇 하는 짓인가 하는 후회도 했다. 20대의 팔팔한 미국 아이들과 경쟁하기에는 나는 너무 연로(?)해 있었고 그 덕에 주말도 없이 매일 새벽 한두시까지 그 연구실에서 버틴 끝에 졸업이란 것을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무모했다. 하지만 그때 내린 결정이 내게 남겨준 것은 있다. 그 잘난 석사 학위? 그것은 종이 한장으로 남았을 뿐, 그보다 더 큰 것은 따로 있다. 첫 학기 첫 시험때 시간이 모자라 답안을 완성하지 못한 뒤 연구실 구석으로 돌아와 억울함에 겨워 찔끔 흘렸던 눈물이 그것이다. 중학생이나 흘릴 법한 눈물을 나이 마흔 셋에 흘렸던 것은 내가 비록 뒤늦게 선택한 길이었지만 그만큼 절실하게 매달려 있었다는 방증이었기에 내게는 소중하게 남아있는 기억이다. 혹 앞으로도 여전히 지각인생을 살더라도 그런 절실함이 있는 한 후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출처:명사 34인 내 인생의 결단의 순간 [http://people.joins.com/special/life_main.asp]


[나를 두번 울린 손석희씨]

방송작가. 최영선



  내가 손석희씨를 처음 본것은 고1 때쯤!

모 프로그램에서 깔끔한 베이지 버버리를 걸치고선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며 인터뷰를 했던 그 모습이 얼마나 멋지고 강렬했는지..
꼭 한번 만나봤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 방송을 본지 꼭 10년후...
나는 손석희씨와 함께 방송을 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런데,,,
그런 손석희씨와 일하며 나는 두번이나 울었던 경험이 있다.

94년,95년 한창 방송되던 MBC의 생방송 아침만들기에서였다.

어느날 아침,
그는 내 대본에 쓰인 오프닝멘트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손 ; "야, 넌 오늘아침 뉴스도 못봤냐?
농민들이 수입개방때문에 국회앞에서 시위하고 난리쳤다는데
어떻게 아침부터 웃음이 보약이라고 멘트를 치냐?"

나 ; (어휴..누가 운동권 아나운서 아니랠까봐...
우리가 무슨 정치프로도 아니고 농민들 시위했다고
그런 분위기에 맞춰서 아침부터 초상집 분위기 낼일있나?)

PD ; 손선배, 그냥 웃으며 살자구 한마디 치고 넘어가면 될것 같은데,
그냥 가죠...

손 ; 난 죽어두 못해.....!


그렇게 한마디 툭 던져놓고 사라지더니
막상 방송이 들어가자 그는 대본에 있는대로 멘트를 했다.

그런데 끝나고 나서...

흑흑..그는 나를 앉혀놓고 한참동안 야단을 쳤다.

어떻게 작가가 되어서 세상물정을 무시하고 멘트를 쓸 수 있느냐고,
그렇게 살면 안된다는둥...

마음약한 나는 억울함,서러움,약간의 뉘우침 등등의 감정으로
끝내 그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나는 손석희씨와 말을 않하고 지냈다.

말하고 싶지가 않았다.
여러가지 감정등이 얽히고 섥혀서..

그는 정말로 강한 캐릭터의 소유자였다.

독설가다운 말투를 비롯해서 자신과 온도가 맞지않는 출연자가 나오면
한마디도 하지않을 정도로 사람을 가렸다.

시시껄렁하고 진지하지 못한것을 참지못했고
그러면서도 한번 마음 준 사람은
줄기차게 정을 주고 잘해주는 정의파 이기도했지만 어쨌든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서 약 3개월후쯤,
개편과 함께 프로그램의 MC가 바뀌는 것으로 결정났다.

야호~~ 나를 비롯해 모든 작가들이 쾌재를 울렸다. (작가들이 솔직히 힘들어 했기때문에..)


그로부터 2주일후...
공교롭게도 나는 손석희씨와 마지막 방송을 하게되었다.

그런데,,,
프로그램이 무르익고 시간이 흘러흘러 MC의 끝인사차례가 돌아왔을때,,,

손 ; 시청자 여러분, 제가 오늘로써 아침만들기 방송을 그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네요. 그렇게도 힘들어서 그만하고 싶었던 이 방송을
그만둔다고 생각하니까 잠이 오질 않더군요. 어제 밤새도록 잠을 설쳤습니다.
.........

그런데..이게 웬일인가.
셋트 한켠에서 그의 클로징멘트를 듣고 있던 나는,
돌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잠을 설쳤다는 말에 한편 안쓰럽기도 했고
그동안 내가 잘못한 모습들이, 선배를 보고도 쌀쌀맞게 대하고
모른척하면서 지낸 내 모습이 뇌리를 스쳐가면서 ...

회한과 아쉬움의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된채로,,
방송이 끝나자마자 나는 손석희씨에게로 달려갔다.

"선배님! 죄송해요. .. 잘못..했어요..."
"..............."

나는 손석희씨에게 화해의 악수를 청했다.

"야....나 그만둔다고 우는 사람 , 그래도 영선이 밖에 없구나...짜식..."

그는 내 손을 꼭 잡고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려줬다.


만약 내가 손석희씨와 마지막 방송을 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지금까지도 그와 말을 하지 않고 소 닭보듯하며
스쳐지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마지막 방송덕에 나는 손석희씨와의 묵은 감정을 털어내고
지금까지도 어디서 마주치든 웃으며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됐다.

그가 요즘 나와 마주칠때 꼭 하는 말...

"야, 너 살쪘다?"
"흥, 제가 살찌는데 뭐 도와주신거 있어요?`
"아니,,,훨씬 보기 좋다구..결혼전에 쇠꼬챙이 같더니..얼마나 보기좋냐?"

(쇠꼬챙이? 으이그...하여간 저눔의 독설은 못말린다니깐...)  

구성작가를 위한 사이버포탈_TVWRIER.CO.KR
[http://www.tvwriter.co.kr/board/askread.asp?kindid=579&id=31&groupid=5910]

손석희 일러스트